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영향 (문단 편집) ==== 전라도의 문화적 영향과 피해 ==== 한국전쟁 당시 육지로는 가장 남쪽에 있었던 전라도 지역에서도 많은 양의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전라남도 지역은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문화재를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등 상당한 양의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 지역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들도 대거 사망하였다. 전라도는 다른 지역들과 달리, 사찰들의 피해가 컸는데, 특히 전라북도 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직접적인 전투에 의한 피해보다는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에 근거지를 둔 빨치산들과 이를 토벌하려는 한국 군대와 한국 경찰들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인한 피해가 크다. 빨치산의 활동 범위가 산악 지역인만큼 그 지역 산사들의 피해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시되었다. 이 지역의 피해는 41개 사찰에 이르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해 사찰 41개 중 가해주체가 확인된 곳은 28개 사찰로 이 중 내장사를 비롯한 26개 사찰은 한국군 및 경찰에 의하여 전소 또는 일부 소실되었고, 완주 운문사는 유엔군의 폭격에 의해 전소 후 폐사되었으며, 임실 도통암은 빨치산과 북한군에 의하여 전소되었다. 전남 지역의 피해 사찰 41개 중 증심사, 수인사, 상백운암, 중백운암, 하백운암, 송천사, 용흥사, 대원사, 일림사 등 9개 사찰은 전쟁 발발 이전에 여순사건과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이미 일부 피해를 입었다. 또한 전쟁 발발 이후 피해를 입은 28개 사찰 중 도갑사 등 전라북도 지역은 강원도 및 서울·경기 지역에 비하여 전소 비율이 높이 나타나는데 이는 빨치산의 근거지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한국 군경에 의하여 소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당시 피해를 입은 사찰들 중 8개 사찰은 전후 복구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폐사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 이어지게 된 일들을 통계내자면, 전라도에서 4개 사찰을 제외한 24개 사찰이 모두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찰이다.''' 거기다가 가해 주체가 확인된 27개 사찰 중 빨치산에 의한 피해는 금곡사와 정수사 등 2개 사찰이고 나머지 25개 사찰은 한국 군경에 의하여 작전상 소각되었다. * 전라도의 문화적 피해 유산 통계[*a] * 부안 실상사[* 부안 실상사는 변산 4대 사찰 중 하나이자, 4대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절이었으며 [[최남선]]이 관광을 올 정도로 유명하였지만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한국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다. [[http://www.weeklyseoul.net/news/articleView.html?idxno=28950|#]]] * 완주 안심사 [* 한국에 얼마 남지 않은 2층 대웅전으로 구성된 대사찰이었지만,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북한군이 점령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중 하나인 '둔산 지구'를 소탕하기 위해 한국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다.] * 완주 봉서사[* 한국전쟁 당시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구역이 전소되어 소실되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대웅전, 관음전, 칠성각, 진묵전, 요사채, 명부전, 나한전, 삼성루, 천왕각, 동루, 서전, 일주문, 상운암 등이 있었으며 태조 어진을 잠시 모셨을 정도로 큰 대찰이었다.] * 완주 운문사[*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폭격에 의하여 완전히 소실되었다. 소실되기 이전에는 큰 법당 한 채, 작은 법당 한 채, 상량전, 산신당,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주변에 크고 작은 암자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완주 송광사[* 완주 송광전투 당시 송광 자위대가 송광사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찰 담이 무너지거나 송광사 건물에 총탄 자국이 남기도 하였다.] * 장흥 보림사[* 본래 [[쌍봉사]], 곡성 태안사와 더불어 손꼽힐만큼 큰 대찰이었지만, 북한군 유격대가 겨울에 이 곳에서 머물렀다가 갔다는 이유로 한국군이 방화하여 일주문과 천왕문만을 남긴 채 20동이 모두 소실되었다.] * 곡성 태안사[* 장흥 보림사, [[쌍봉사]]와 더불어 손꼽힐 정도로 큰 대찰이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다.] * 정읍 [[내장사]][* 1951년 [[1월 12일]]에 한국군의 빨치산 토벌작전의 일부로, 천왕문을 제외한 절 전체가 모두 소각되어 1957년 재건되었다.] * 정읍 영은사[* 한국전쟁 이전에는 1938년에 매곡선사가 대웅전을 보수하고, 명부전과 요사를 새로 지어올리는 등 여러 보수를 거쳐오며 보존되었지만, 한국전쟁 때인 1951년에 전부 불타 없어져서,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모두 다시 복원한 것이다.] * 광주 약사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불을 질러 소각되었다. 다만 대웅전에 모신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00호)은 스님들이 빼내어 보존되었다.] * 광주 증심사[*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한국군에 의해 오백전을 제외한 증심사의 전 구역이 소각되었다. 당시 증심사에서 보관되던 금동석가여래입상(당시 국보 제211호)과 금동보살입상(당시 국보 제212호)은 광주경찰서 금고로 옮겨 보관되고 있었으나 전쟁 중에 유실되어, 국보 지정도 해제됐다. 현재는 복원된 건물들을 제외하면 오백전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석조보살입상, 칠층석탑만이 남아있다.] * 순창 강천사[* 선운사의 말사로 지어져 임진왜란을 버텨냈지만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소각으로 칠성각, 첨성각, 보광전의 당우가 불타 소실되었다.[br]"강천사가 소실된 것은 1950년 12월 20일쯤이죠, 당시 11사단 20연대 1중대가 순창군 금과면과 순창군 팔덕면의 치안을 담당했는데, 이들이 강천사에 불을 질렀죠. 의용경찰이 있었는데도, '''강천사에 불을 지른 것은 군인들이었어요.''' 당시 이 지역 역시 낮에는 한국군이 있었고, 밤에는 빨치산들이 있었습니다."[br]강천사의 아랫마을인 순창군 팔덕면 신기마을에 사는 김병관(80)의 증언이다. 순창과 담양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강천산은 빨치산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회문산과 가깝다. 또 산악지대로 연결되어 있어 당시 강천사 인근의 빨치산은 주로 가마골을 근거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건물들이 불타 소실되었고 5층석탑이 원형을 잃었다. ] * 순창 구암사[* 구암사는 내장산과 백양사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 역시 회문산과도 그다지 멀지 않아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빨치산들은 세력이 약화되고 한국군과 경찰의 토벌이 강화되자 구암사를 근거로 저항했다. 하지만 한국군과 경찰은 강하게 몰아붙여 많은 빨치산을 토벌했고, 이 과정에서 구암사와 그 아랫마을은 모두 경찰에 의해 타 버렸다. 구암사가 소각된 뒤 많은 빨치산들이 죽어 한동안 구암사 근처에 시신들이 남아 있을 정도라고 한다. 구암사 아랫마을에 사는 공필순 할머니(95)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중략) '''경찰들이 토벌하러 와서 구암사에 불을 질러버렸어.''' 그리고 올라가서 많은 빨치산들을 죽였어. 내가 한참 뒤에 올라가 보니 빨치산들 해골이 여기 저기 보였어! 얼매나 무섭던지!" 라고 증언한 바 있다.] * 순창 만일사[* "1952년 봄 대대적으로 빨치산 토벌을 했는데, 이 때 마을이 비행기로 폭격 돼 마을이 다 탔어요. 인근에 있는 안심마을도 그랬고. 비행기로 폭격한 시간이 대략 점심 때 였는데, 휘발유통을 떨어뜨린 후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휘발유통에 불이 붙어 확산됐습니다. 만일사가 빨치산들의 은신처로 이용되고 있다는 게 알려진 뒤에 들어온 경찰들이 불을 지른 것이죠." (한국전쟁 당시 경찰들이 만일사를 방화하는 것을 직접 본 박만선의 증언) 빨치산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바로 회문산은 현재 휴양림으로 개발되어 있는데, 휴양림 안에는 당시 빨치산 사령부가 있던 자리에 빨치산들의 활동공간을 모두 복원해 놓았다. 회문산 아래 쪽에 위치한 만일사는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모두 탔기 때문이다. 소각될 당시 만일사에는 법당, 칠성각, 요사채, 화장실 등이 있었다. 법당은 매우 오래된 건물이어서 남아 있었다면 문화재가 되었을 것이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 역시 엄청나게 규모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불상은 철불이었는데 겉모양은 갸름했다. 이 밖에 쇠부처님 세 분이 있었고, 40여 개가 넘는 불상이 있었다. 만일사가 소각될 때 절에는 5~6명의 스님을 포함해 안노장 스님이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화재로 인해 입적, 마을 사람들이 스님을 화장시켰다고 전해진다.] * 장성 [[백양사]] 운문암[*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백양사 내 8개의 암자 중에서 가장 큰 암자이자 대표암자였지만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사찰 소각작전으로 불타 사라졌다.] * 순천 [[송광사]][*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사찰하면 대부분 들어갈 정도로 대표적인 피해 문화재.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에도 절의 중심부가 일부 불타기는 하였지만 어느정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폭격으로 송광사 내의 중심구역, 즉 대웅전 일대가 모두 박살나게 되었다.] * 무주 백련사[* 본래 백련암 등으로 불리며 조선 말기까지 중수를 거듭한 사찰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때 빨치산 토벌작전 당시의 폭격으로 모두 불타 사라졌다. 현재는 다시 복원하여 선수당, 요사, 일주문, 대웅전, 원통전, 명부전, 천왕문, 우화루 등이 있다.] * 순천 [[선암사]][* 본래 100여 동에 이르는 건물이 있었던 대찰이었으나 여순사건으로 일부 건물이 방화되어 무너지고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불각 9동', '요 25동', '누문 31동', '도합 65동'에 이르는 건물들 중 70여 동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어 현재 20동밖에 남아있지 않다.] * 화순 불회사[*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사찰 외곽지역의 건물들이 파괴되어 사라졌다.] * 영암 [[도갑사]][* 전쟁 중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도갑사에 폭격이 가해저 명부전과 해탈문을 비롯한 일부 건물들을 남기고 사찰 내부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전소되거나 파괴되었다.] * 구례 연곡사[*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사찰 전체가 불타거나 무너져 사라졌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모두 재건된 건물들이다.] * 구례 천은사[* 다른 절들처럼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소각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전투의 영향으로 절 내부에 총탄세례가 오갔으며 현재도 화승당 앞에 남아있는 범종에는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http://blog.naver.com/edin1115/220518280435|#]]] * 광양 광양[[향교]][*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광양 폭격으로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 복원되었다.] * 광양 상백운암, 중백운암, 하백운암[*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 당시에 이미 피해를 받은 상태로 한국전쟁이 직격타를 날려서 3개의 사찰 모두 완전히 소실되었다.] * 임실 도통암[* 전라북도 지역에서 유일하게 빨치산에 의하여 소실된 절로, 현재는 새롭게 바뀌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 용흥사 * 대원사 * 일림사 * 수인사 * 송천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